지조의 시간을 품은 거창 정온선생고택 산책기
거창 위천면의 좁은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낮은 돌담 너머로 기와지붕이 겹겹이 이어진 고택이 보입니다. 바로 조선 중기의 학자 정온 선생이 살았던 집, 정온선생고택이었습니다. 들판과 산 사이에 자리한 집은 바람이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입구의 솟을대문 위 현판에는 세월의 결이 묻어 있었고, 그 앞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잔잔히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루의 나무 냄새와 함께 흙바닥의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집의 형태와 분위기는 그대로였습니다. 정온 선생이 지조와 학문으로 살았던 흔적이, 마치 이 공간의 공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습니다.
1. 산 아래 마을길 따라 이어지는 입구
정온선생고택은 위천면 상천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창읍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입니다. 내비게이션에 ‘정온선생고택’으로 입력하면 정확히 안내됩니다. 마을 입구에 작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그곳에서 도보로 3분 정도 걸으면 고택 담장이 나타납니다. 담장은 낮고 단정하게 쌓여 있었으며, 군데군데 이끼가 자라 있어 세월의 흔적이 선명했습니다. 입구 앞에는 돌로 만든 표지석과 함께 안내문이 서 있었고, 그 뒤로 대문이 정중히 닫혀 있었습니다. 오전에 방문하니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담장 위로 얇은 수증기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현대의 소리가 모두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길은 짧지만 그 안에 긴 시간의 흐름이 스며 있었습니다.
2. 고택의 구조와 조화로운 공간
정온선생고택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사당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조선 중기 양반가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안채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부엌과 안방이 ㄱ자형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대청마루가 넓고 앞마당이 열려 있어 외부 손님을 맞이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마루에 앉으면 앞산의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바람이 자연스럽게 통했습니다. 기둥과 서까래는 굵고 단단하며, 세월에 의해 색이 바래져 있었습니다. 단청이 없는 목재의 질감이 오히려 이 집의 절제된 품격을 보여주었습니다. 흙벽 사이에는 작은 균열이 있었지만, 그 틈마저 자연스러웠습니다. 전체 구조가 바람의 흐름과 햇살의 방향에 맞춰 지어졌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3. 정온 선생의 정신이 남은 자리
정온(鄭蘊, 1569–1641) 선생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호 ‘위계’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택 주변에는 ‘위계정사’라는 별당 건물도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에는 “지조와 절의를 실천한 선비의 삶이 깃든 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채 벽에는 당시의 교지와 글씨가 복제본으로 전시되어 있었고, 선생이 직접 사용했다는 목책상이 한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작은 벼루와 붓, 잉크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단정한 방 구조와 소박한 가구들이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치나 과장이 없이, 오직 바른 뜻으로 세월을 보낸 흔적이었습니다.
4. 고택의 세심한 관리와 주변 풍경
고택은 지역 문화재 보존회에서 꾸준히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마당은 깨끗하게 쓸려 있었고, 꽃나무와 대나무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뒤편으로는 낮은 언덕길이 이어져 사당으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사당 앞에는 돌계단이 세 줄로 놓여 있고, 향나무 한 그루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곳곳에 작은 안내 표지판이 있어 방문객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되어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고, 가을에는 감나무와 은행잎이 마당을 노랗게 물들입니다. 관리인 한 분이 기와를 살피며 먼지를 털고 있었는데, 조용한 손길 속에서도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고택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집처럼 느껴졌습니다.
5. 인근에서 함께 둘러볼 명소들
정온선생고택을 둘러본 뒤에는 인근의 ‘거창 수승대’를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차로 10분 거리로, 맑은 계곡과 절벽이 어우러진 명승지입니다. 또한 ‘거창향교’도 가까워 조선시대 교육문화의 흐름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위천면 중심가의 ‘대평식당’에서 제육정식을 먹었는데, 직접 담근 장맛이 깊었습니다. 고택의 고요함과 대비되는 시장의 활기가 하루를 균형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거창박물관’에 들러 지역 인물 자료를 살펴보면 정온 선생의 생애를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와 자연, 사람의 흔적이 이어지는 동선이었습니다.
6. 방문 시 알아두면 좋은 점
정온선생고택은 사유지이면서도 일반에 개방되어 있습니다. 방문 전 운영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입장료는 없으며, 건물 내부 출입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신발을 벗고 마루 앞에서만 관람이 가능합니다.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플래시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오전 10시 전후로 햇살이 대청마루를 부드럽게 비추어 사진이 아름답게 나옵니다. 여름철에는 벌레가 많으니 긴 옷을 챙기면 좋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조용히 생활하는 곳이므로 큰 소리로 대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차장에서 고택까지의 길이 좁으니 차량 통행 시 천천히 이동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조용히 걷는 태도만으로도 이 공간의 품격이 전해졌습니다.
마무리
정온선생고택은 단순히 오래된 집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 머물러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마루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주변의 산세를 바라보니,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고요함이 느껴졌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그 속에는 올곧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습니다. 집 전체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절제된 구조와 여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짧은 머무름이었지만 마음이 맑아지는 경험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봄비 내리는 날 다시 찾아, 기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이 고택의 또 다른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정온선생고택은 거창의 시간과 정신이 조용히 흐르는, 진정한 국가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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